"내 앞에서 자살폭탄이 터지길 원했다"

2008. 4. 10. 14:1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ㆍ아프간 누빈 유일 한국 사진기자 정은진

사람의 생사가 몇 발자국 차이로 갈리는 곳이 아프가니스탄이다. 언제 폭탄이 터질지, 어디서 미군과 탈레반의 총격전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이 현장에 프리랜서 사진기자 정은진씨(37)가 있었다. 전 세계 기자들이 특종을 욕심내며 아프간으로 모여들었지만 한국인 사진기자는 정씨가 유일했다.

그는 2006년 8월부터 약 1년간 아프간에 체류하며 전쟁의 참상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이때 작업했던 '아프간 산모 사망률: 카마르 스토리'는 2007년 세계적인 보도사진전 '페르피냥 포토 페스티벌'에서 '케어 인터내셔널 휴머니티 르포르타주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그는 아프간에서 한국인들이 피랍됐을 때 '김주선 통신원'이라는 필명으로 국내 일간지에 기사를 보내기도 했다.

아프간을 떠난 뒤 아프리카 콩고에서 취재하던 그는 현재 한국에 돌아와 사진 전시회 '카불의 사진사: 부르카 밑의 웃음소리'를 열고 있다. 지난 4일 서울 광화문에 있는 전시회장에서 그를 만났다.

-지난 2월 에세이 '카불의 사진사'를 출간하셨습니다. 취재하느라 바빴을 텐데 책은 언제 쓰신 겁니까.

"카불에서 썼던 일기를 책으로 만든 거예요. 서울에서는 편집만 했습니다. 책은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재미있어야 내용이 머리에 쏙쏙 들어오고 이해가 잘 되실 것 같아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했어요. 일기를 쓰던 당시에는 가능하면 제 감정에 솔직하려고 했기 때문에 과격한 표현도 있었어요. 그런 것들은 편집 과정에서 많이 순화됐습니다."

-아프간은 미국의 침공 이후 혼란스럽습니다. 그런 곳에서 취재한다는 게 두렵지는 않았습니까.

"무서웠죠. 다치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라 내가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그게 많이 두려웠습니다. 그때 저는 절박했어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프간에서 승부를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프리랜서를 3년간 했지만 그간의 경력은 다 잊어버리고 밑바닥부터 시작하자, 초심으로 돌아가서 내가 왜 사진을 하고 왜 저널리즘을 택했는지 고민해보자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프간의 상황은) 상관이 없었습니다."

-정 기자의 이력을 보면, 같은 여성이면서 분쟁 지역을 취재하고 있는 김영미 PD가 떠오릅니다.

"저는 분쟁 전문 기자가 아닙니다. 언론에서 자꾸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간 곳이 아프간이라는 점이 부각된 것뿐입니다. 아프간에서 일하고 책을 냈다고 다 분쟁 전문 기자는 아니잖아요."

-아프간 외에 어느 지역을 취재했습니까.

"중동 좀 다니고 중앙아시아를 많이 다녔습니다. 2004년 초엔 두달 정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 있었어요. 이란과 인도네시아도 갔었고. 하지만 중요 뉴스가 발생하는 곳을 다 취재하는 건 아닙니다. 레바논 공습 때 레바논 안 갔고, 이라크 전쟁 때 바그다드 안 갔어요."

-아프간은 사회 분위기가 보수적이라 사진 취재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취재원에 대한 접근의 90%는 거부당했습니다. 탈레반이 아프간 국토의 90%를 장악했던 1996~2001년까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됐고 사진 및 영상물의 복사도 금지됐어요. 여성들은 크게 웃을 수 없었고 전부 부르카를 쓰고 다녔습니다. 외출할 때는 직계가족 남성과 동행해야 했어요. 그런데 제가 갔던 바다흐샨 주는 탈레반이 지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문화와는 약간 달랐어요. 물론 거기도 아프간이니까 사진기자를 경계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머지 지역에 비하면 조금 나은 상황이었어요."

-취재를 하다보면 운도 많이 따라야 할텐데요.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저는 제 바로 앞에서 자살폭탄이 터지기를 원했습니다. 그건 사건이고 사건은 시간 싸움이니까요. 그런데 그런 일은 한번도 없었어요. 그 운은 없었죠. 제일 운이 좋았던 것은 '아프간 산모 사망률: 카마르 스토리' 작업을 할 때 취재원들이 취재를 허락해준 겁니다. 취재원이 안 된다고 하면 못하거든요. 그런데 취재원을 잘 만났죠."

-산모 사망률을 취재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아프간이라고 하면 분쟁이나 탈레반, 군사 작전에 대해 기사가 많이 나오는데요. 폭격이나 군사 작전으로 죽는 사람은 1년에 수천명이지만 1년 동안 사망하는 산모 수는 2만5000명입니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아프간 산모 사망률이 2위예요. 바다흐샨 주의 어떤 시골 동네는 65%에 이르기도 해요. 아프간은 내전을 오래 해서 인프라가 없어요. 산세가 험하고 산사태로 길이 씻겨나가면 차가 못 다닙니다. 여자들이 당나귀를 타고 병원에 다녀야 해요. 저는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내전의 여파로 고생하는 건 여자와 어린이들이 아니냐 하는…."

-'카마르 스토리'로 상을 탔는데, 상을 타고 난 후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상이라는 게 주관적이긴 한 건데…. 어쩔 수가 없어요. 상을 탔다고 하니까 사람이 주가가 더 올라 보이는 거죠. 인지도가 높아졌다고나 할까. 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이 일하는데, 타이틀이라는 게 그렇게 무서운 거죠."

-산모 취재는 정 기자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텐데…. 여성이라 취재에 수월한 점이 있지 않습니까.

"여자들이 못하는 취재는 더 많아요. 남녀 구분이 엄격해서. 모스크(사원)처럼 남자들만 있는 곳은 못 가요. 모스크에서 신도들이 기도하는 사진 있잖아요? 그런 건 절대 못 찍습니다."

-책을 보니 '키가 큰 백인 여성이고 싶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언제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아프간 남성들이 성추행을 너무 많이 하는 겁니다. 집에 들어와서 속상하다고 했더니 함께 사는 백인 친구들이 '나한테는 그런 일이 안 일어나는데 너는 중국인처럼 생겨서 사람들이 창녀로 알고 그러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얘기를 들을 때 마음이 제일 아프죠."

-정 기자를 성희롱했던 아프간 남성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면서요.

"제가 그들에게 침을 안 뱉은 게 다행이죠. 다른 백인 여성 기자들은 침도 뱉고 그래요."

-서울대 동양화과를 졸업했습니다. 왜 미술을 하다 사진으로 방향을 바꿨습니까.

"그냥 사진이 좋아서 했어요."

-사진에도 직종이 다양하지 않습니까. 왜 기자를 택했습니까.

"유학갈 때 입학 허가를 받았던 뉴욕대(NYU) 티시 스쿨(Tisch School of Arts)에서 졸업 전시회 도록을 보내줬는데 거기 한 홈리스(노숙자) 여인의 초상이 있었어요. 지금 뉴욕타임스에서 일하는 이장욱 기자가 학생일 때 찍은 사진이었어요. 나이 든 홈리스 여인이 남루한 옷을 입고 눈에 눈물이 고여있는 초상화였는데, 다른 사진보다 훨씬 깊이가 있고 감동을 주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사실을 전달하는, 인간의 감정을 전달하는 그 사진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어요. 사람들의 삶을 꾸밈없이 기록하는 다큐작업이 저한테 맞는 것 같았습니다."

-기자로서 일을 시작한 곳은 어디였습니까.

"미주 한국일보였는데 주로 글을 썼어요. 사회부에 있다, 나중에 기획에도 있었고 그만두기 직전 1년 동안 문화부에 있었습니다. 퇴근하고 난 뒤엔 뉴욕 국제사진센터(ICP)에서 야간 수업을 들었어요. 직장생활 하면서 안주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사진을 더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ICP 다니면서 대학원 진학을 준비했어요."

-미국 언론사에서도 일을 했습니까.

"대학원을 2년 다니는 동안 여름 인턴십을 2번 했습니다. 처음은 뉴욕에 있는 '뉴스데이'였고 두번째는 'LA타임스'였어요. 한국일보를 그만둔 게 2001년 2월초인가 그랬어요. 8월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에 6개월 정도 시간이 있잖아요. 시간제로 주류 사회에서 일을 해보고 싶어서 뉴욕에 있는 'AP'와 '빌리지보이스', 뉴스데이에서 스트링거를 했습니다. 뉴스데이에서 2개월 일했는데 6개월 인턴십을 주겠다고 하더군요. 미주리에서 대학원을 다녀야 하기 때문에 못하겠다고 했더니 2002년 여름 인턴십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 해에 사진기자를 1명 뽑았는데 그걸 하게 된 거죠."

-한국에서 일할 계획은 없었습니까.

"대학원 졸업하고 뉴욕에서 프리랜서를 했습니다. 9·11 테러 이후에 경제가 많이 나빠져서 직장을 구할 수 없었어요. 뉴욕 생활비가 비싸서 생계 유지를 못 하겠더군요. 서울에 기반을 잡고 주변국을 왔다갔다 하면서 작품을 해봐야겠다 해서 한국에 나온 게 2003년 10월입니다. 이주노동자와 농민 시위 현장에 많이 나갔어요. 그런데 아무도 관심을 안 가졌습니다. 우리나라에 각국 통신사들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통신사 사진을 쓰면 되지 프리랜서 사진은 쓸 일이 없는 거죠. 그래서 4개월간 돈도 한푼 못 벌고 허송세월 했습니다. 그러다 이듬해 2월에 '코비스'라는 포토 에이전시와 계약을 했고 같은해 6월에 지금 있는 '월드 픽처 뉴스'로 옮겼어요."

-한국에서 활동하는 것만으로는 사진기자로 살아남기 힘든 겁니까.

"저는 프리랜서니까 직장이 있는 분들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보도사진을 하는 프리랜서에게 국내는 좋은 토양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서구 언론의 인정을 받으려면 취재 지역도 그들이 선호하는 곳으로 고르게 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그렇죠. 예를 들어 서양의 군대가 주둔하는 곳, 자국민의 희생이 있는 곳은 언제든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어있습니다. 아프간은 미군과 캐나다군, 영국군이 매일 죽어요. 그런데 기자가 안 들어가겠습니까. 자국민이 죽고 독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데…. 언론에서 당연히 취재할 수밖에 없죠."

-아프간을 떠난 후엔 콩고에서 취재를 했습니다. 콩고는 왜 가셨습니까.

"콩고와 르완다에 있었습니다. 르완다는 상황이 안 복잡한데 콩고가 복잡했죠. 콩고는 내전 때문에 연간 수천명의 여성이 반군들에게 강간을 당해요. 강간도 한 명한테가 아니라 윤간을 당하는데 그 수법이 너무 잔인해요. 그것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성들 인터뷰하고 사진 작업을 했습니다."

-다시 콩고로 돌아가십니까.

"모르겠어요. 중국에 갈까 생각 중입니다. 올림픽을 하니까."

-이번에 펴낸 책은 에세이였는데 사진만 모아서 책을 낼 계획은 없습니까.

"사진기자의 욕심으로는 에세이를 출간하는 것보다 사진집을 내는 게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더 많은 작품을 전시했으면 좋겠고요. 마치 회고전처럼 지금까지 다닌 곳에서 찍은, 많은 사진들을 보여줄 수 있는 전시를 하고 싶어요."

-사진기자로서, 어떤 기자가 좋은 보도 사진가라고 생각합니까.

"자신의 사진으로 세계인을 감동시키는 사람, 세상을 좀더 좋은 세상으로 바꿀 수 있는 영향력이 있는 사람, 자신의 시각적인 이미지로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좋은 보도 사진가라고 생각합니다."

〈 최희진기자 daisy@kyunghyang.com 〉

[스포츠칸 '온에어' 원작 연재만화 무료 감상하기]

-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 -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향닷컴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