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미카제 위령비' 앞에 선 일본 여배우의 눈물

입력 2008. 5. 10. 16:55 수정 2008. 5. 10.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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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

광복회 경남지부과 사천진보연합 회원들은 10일 낮 12시30분경 경남 사천시 서포면 외구리 체육공원 입구에서 '귀향 기원 위령비' 제막식에 반대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윤성효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원을 기리는 '귀향 기원 위령비' 제막식은 결국 열리지 못했다. 제막식을 막아선 시민단체는 "위령비 철거하겠다는 약속을 김수영 사천시장이 지키지 않을 경우 주민소환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경남 사천시는 10일 하루 내내 뜨거웠다. 대한 광복회 경남지부와 사천진보연합은 위령비 제막식을 막았으며, 일본 여배우 구로다 후쿠미 등 일본인들은 위령비 앞까지 왔다가 서서 목례만 한 뒤 돌아갔다.

위령비는 일본이 저지른 태평양전쟁 때 '가미카제' 특공대원으로 출격해 전사한 탁경현(1920년생, '미쓰야마 부미히로'로 창씨개명) 등을 기리는 것이다.

[오전 10시] 심포지엄 취소... 광복회원, 행사장 앞 항의

10일 오전 10시 사천문화예술회관 앞. 광복회원 30여명이 모여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구호를 적은 어깨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이날 오전 열릴 예정인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에 대한 심포지엄'을 막기 위해서 모인 것.

애초 이날 심포지엄을 준비한 것은 '귀향 기원 위령비' 건립실행위원회. 그 동안 위령비 건립에 대해 반대여론이 들끓자 위원회는 심포지엄을 취소했다. 그러나, 광복회원들은 "혹시 몰래 토론회를 열 수도 있다"고 보고 아침부터 모여든 것.

심포지엄은 사천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열리기로 되어있었으며, 구로다 후쿠미와 홍종필 전 명지대 교수, 위령비를 디자인한 고승관 홍익대 교수 등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사천문예회관 입구에는 심포지엄이 "주최 측의 사정으로 취소되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문예회관 소극장은 단상에 토론자들이 앉을 자리만 배치되어 있었고 현수막도 없었다. 광복회원들은 문예회관 정문에 붙어있는 안내문을 보고 심포지엄이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돌아갔다.

10일 오전 사천문화예술회관에서는 '미래 지향적인 한일관계에 대한 심포지엄'이 열릴 예정이었으나 취소되었다. 사진은 한 광복회원이 안내문을 보고 있는 모습.

ⓒ 윤성효

김형갑 지부장 "가미카제 특공대원 위한 위령비 막을 것"

김형갑 광복회 울산·경남연합지부장은 "목숨을 다할 때까지 가미카제 특공대원을 기리는 위령비는 막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지부장은 이날 머리띠를 두르고, 구호를 선창하면서 제막식 저지 투쟁을 주도하기도 했다. 다음은 김 지부장과 나눈 대화 내용이다.

김형갑 광복회 경남울산엽합지부장.

ⓒ 윤성효

- 위령비가 왜 부당한가?

"여기는 한국 땅이다. 일본 가미카제 특공대원으로 조직된 탁경현은 한국사람이었지만 일본, 그것도 일본천황을 위해 죽었다. 우리 민족의 역적이다. 그런 사람의 위령비를 세우도록 가만히 둔다면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선조들이 무어라 하겠는가."

- 탁경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사천 출신으로, 6살 때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갔다고 한다. 일본에서 자랐다. 일본항공학교에 들어가 조종사 훈련을 받고 가미카제 특공대원이 됐다. 일본 천황을 위한 충성맹세를 하고 전사했다. 현재 국민감정을 생각할 때 그런 사람을 기리는 비석을 세울 수는 없다."

- 사천시가 터를 제공해 준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떻게 우리 민족의 가슴이 못을 박는 일을 사천시가 할 수 있단 말인가. 일본천황을 위한 사람들에게 우리 땅 한 뼘도 내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사천시는 관광자원화를 위해 필요하지 않느냐고 보았던 것 같은데?

"관광사업을 핑계로 매국행위도 미화해서 돈벌이로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민족정신에 맞지 않다. 그것은 바로 제2의 친일행위다."

- 사천시가 위령비를 철거할 것으로 보는지?

"철거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지난날에 잘못된 현충 시설물들을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은 속에, 이런 위령비를 세운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사천시장이 엊그제 시민단체를 만났을 때 철거하겠다고 했으니까 그 약속을 지켜야 할 것이다."

위령비 입구 막은 회원들, 위령비 에워싼 경찰

광복회원들은 버스로 위령비가 세워져 있는 사천시 서포면 외구리 체육공원으로 향했다. 옛 삼천포 시가지를 벗어나 사천만을 가로질러 건설된 사천대교를 건넜다. 그 곳에는 이미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고, 사천진보연합에서 현수막을 들고 입구에 서있었다.

사천진보연합은 "사천시는 가미카제 특공대원 탁경현 위령비를 철거하고 전국적 수치로 만들어버린 사천시민의 자존심을 살려내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들고 서 있었다. 이 자리에는 이정희 사천시의원 등이 나와 있었다.

경찰은 광복회원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위령비 입구를 막았다. 광복회원들은 경찰을 향해 항의하기도 했지만 물리적인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한 광복회원은 "만약에 일본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건립한다고 하면 일본이 가만히 두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김성숙 광복회 사천지회장은 "사천 출신의 애국지사는 2명이 있는데, 그들을 기리는 사업은 아무 것도 없다"면서 "독립운동가들도 제대로 기리지 못하는 판국에 일본 천황을 위해 죽은 사람을 기린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졌다.

광복회원들이 체육공원 입구를 막아서자 경찰이 그 앞에 배치되어 있다. 사진 가운데 뒷 부분에 천막으로 둘러쳐져 있는 게 위령비다.

ⓒ 윤성효

사천시 서포면 외구리에 건립되어 천막으로 가려져 있는 '귀향 기원 기원비' 비문을 광복회 회원들이 살펴보고 있다.

ⓒ 윤성효

김형갑 지부장 등 일부 회원들은 경찰의 양해를 얻어 위령비를 살펴보기도 했다. 위령비는 파란색 천막으로 둘러쳐 놓은 상태였다. 위령비 명칭은 '귀향기원 위령비'이며 한글과 일본어로 되어 있었다.

위령비 앞면에는 "태평양전쟁 때 사천에서도 많은 이들이 희생되다, 전쟁 때문에 소중한 목숨을 잃은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비노니 영혼이나마 편안하게 잠드소서"라고, 뒷면에는 "평화스러운 서포에서 태어나 낯선 땅 오키나와에서 생을 마친 탁경현, 영혼이나마 그리던 고향 땅 산하로 돌아와 편안하게 잠드소서"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위령비건립실행위원회 측에서는 '탁경현을 위한 비가 아니다'고 했지만, 위령비 옆면에는 탁경현의 창씨개명한 이름과 함께 연혁이 적혀 있었다. 김형갑 지부장은 "실행위원회 측에서는 명칭에 탁경현이라는 이름이 들어가지 않았다며 태평양전쟁 때 희생된 조선인을 위한 비석이라 했지만, 비석 옆면에 탁경현의 연혁까지 적어 놓았는데 어째서 탁경현의 위령비가 아니란 말이냐"고 말했다.

[낮 12시 30분] 초청 인사들 속속 도착... 일본 언론사 10여곳 취재

탁경현, 1945년 4월 11일 출격해 전사

탁경현은 1945년 5월 11일 전투기를 몰고 가고시마 기지에서 출격, 전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5살.

2001년 일본에서는 숨진 한국인 가미카제의 약혼자와 살아남은 일본인 가미카제 대원의 사랑을 그린 영화 <호타루>로 제작되기도 했다. 당시 영화 속 한국인 가미카제는 탁경현을 모델로 했다.

탁경현은 일본 입명관(리쓰메이칸)중학교와 교토약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육군항공대에 입대해 가마카제에 차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로다 후쿠미는 지난 3월 일본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사천에 위령비 건립 계획을 밝혔다.

이 위령비는 일본 여배우 구로다 후쿠미가 재정지원을 하고 사천시가 터를 제공했으며, 고승관 홍익대 교수(조형대학 프로덕트디자인)가 제작했다. 실행위원회 측은 탁경현이 가미카제로 출격하기 하루 전날을 기념해 5월 10일 제막식을 열 예정이었다.

위령비 제막식은 이날 낮 12시 30분경 열릴 예정이었다. 예정된 시각이 가까워지자 초청 인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에 있는 재일민단 본국사무소 관계자, 왜관과 군산에서 온 '태평양전쟁 오키나와 유족회' 회원들도 보였다. 또 탁경현의 유족들도 나타났다.

재일민단사무소 관계자는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한일관계가 좋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면서 "일본에 사는 한국인들은 고생을 많이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두 나라가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광복회원들의 항의 장면을 본 그는 "이것대로 이유가 있지만, 과거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입장을 밝히지 않겠다"고 말했다. 태평양전쟁 오키나와 유족회 회원들은 "제막식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을 받고 왔다"면서 특별히 언급을 피했다.

이날 현장에는 일본 언론사 10여 곳에서 취재를 했다. 일부 광복회원들은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취재하느냐"며 항의하기도 했다.

일본인과 실행위원들이 사천에 있는 숙소에서 출발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광복회원들은 체육공원 입구에 모였다. 이들은 현수막을 앞에 놓고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경찰이 불상사에 대비해 막을 막아서자 광복회원들은 "그렇게 막아서면 일본인들이 우리를 어떻게 볼 것이냐. 비켜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한 광복회원이 "위령비를 파괴해 버리자"고 하자 김형갑 지부장은 마이크를 잡고 "순서가 있고 절차를 밟아야 한다. 사천시가 철거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성백 전 진주교대 교수가 위령비 옆면에 새겨진 탁경현의 약력을 읽어보고 있다.

ⓒ 윤성효

김종화 전 사천환경운동연합 의장은 "늦게 위령비 건립 소식을 알고 대처가 늦어 죄송하고 부끄럽기 그지 없다"면서 "사천이 근래 들어 강기갑 의원이 당선되면서 자랑스러웠는데, 지금은 위령비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정희 사천시의원은 "한 달 전 사천시로부터 보고를 받고, 탁경현의 약력을 보았을 때 도저히 기념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일본 여배우가 꿈에 탁경현이 나타나서 '전쟁에서 죽은 것은 억울하지 않는데 조선인이 일본인으로 죽은 게 억울하다'고 했는데, 그 꿈 이야기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 행정이 일본 여배우의 꿈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할 수 있느냐"면서 "한일 간 평화공존을 만들어야 하지만 이런 식으로 기념비를 세워서는 안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탁경현은 젊은 나이에 죽어 안타깝다. 하지만 그는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 천황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면서 "사천시장은 '처음에는 징용으로 가서 죽은 사람인 줄 알았다'고 했다. 사천시장이 일본 여배우의 말만 듣고 위령비 건립을 추진한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또 이정희 시의원은 "지금 사천에 일본인들이 위령비 제막식을 열기 위해 와 있는 모양인데, 남의 나라에 와서는 예의를 지켜야 할 것"이라며 "위령비를 철거하라고 하는 마당에 그들이 여기까지 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일본 여배우 구로다 후쿠미의 '눈물'

이 날 일본 여배우 구로다 후쿠미 등 일본인 방문객 30여명은 사천시청 관계자의 안내를 받으며 체육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이들은 체육공원 입구에 광복회원 등이 막아서고 있는 장면을 본 뒤 머뭇거리기도 했다.

이들은 경찰 저지선까지 다가가 합장한 뒤 두 번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구로다 후쿠미는 염주 같은 것을 손에 들고 있었으며,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취재진들이 묻자 간혹 눈시울을 붉히면서 한국말을 섞어가며 대답하기도 했다. 그는 "위령비 제막식을 막고 그러는데, 위령비는 영혼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었다"면서 "정말 아쉽다, 한국과 일본에서 위령비가 어떤 의미인지 알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항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한일 관계가 미래지향적으로 되기를 바란다. 앞으로 더 화해하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다.

"앞으로 철거할 계획이라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지금 대답할 수 없다, 좀더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눈물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구로다 후쿠미씨는 "최선을 다했다는데 만족한다. 아쉽다"고 말했다.

일본 여배우 구로다 후쿠미씨가 위령비 제막식이 무산되자 체육공원을 나오면서 눈물을 보이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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