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만에 입 연 변양균 "신정아? '빨래'처럼.."

이도은 2012. 1. 14.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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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4년여 만에 세상으로 나온 변양균 전 실장'빨래'라는 노래처럼 다 털어 버리고 싶다아내는 '내가 야단칠 일, 왜 국가가 야단'이냐고 ..

[사진=박종근 기자] 변양균(63). 그가 다시 세상에 나섰다. '신정아 사건'으로 청와대 정책실장을 물러난 지 4년4개월 만이다.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들을 책으로 엮었다. 하지만 지난해 먼저 책을 펴낸 신씨처럼 과거에 대한 개인적 소회는 아니었다. 『노무현의 따뜻한 경제학(바다출판사)』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노 전 대통령 시절의 경제정책을 되짚었다. 8시간을 넘긴 인터뷰에서 그는 참여정부에 대한 애정과 아쉬움을 쉼 없이 드러냈다. 반면 어느 정도 예상했으리라 여겼던 '신정아' 물음에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할 말은 많아 보였지만 주저했다. 질문이 나올 때마다 허허 웃었지만 마음의 생채기가 남은 듯했다. 그럼에도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책을 냈다고 했다.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가 노무현 정권에 치명타를 안겼던 당시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이젠 '정말 인간답게' 경제 전문가 변양균으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유폐 생활' 이제 그만

10일 오후 서울 홍대 앞 한 카페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오랜만에 하는 공식 인터뷰에 상기된 표정이었지만 표정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밝았다. "사진보다 젊어 보이신다"는 인사에 "그때 하도 비참한 사진만 봐서 그런 거죠"라고 답할 정도로 여유로웠다. 자리에 앉은 그는 활자가 빼곡히 인쇄된 A4용지 10여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인터뷰 전날 오후에 기자가 보내준 인터뷰 질문지에 그가 직접 준비한 '답안지'였다. 새벽 두세 시까지 준비하며 썼다고 했다. "질문을 미리 받은 만큼 답변도 당연히 미리 '써야' 하는 줄 알았다"고 말하며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오랜만에 인터뷰에 응했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내게 '유폐 생활'이라는 표현을 쓰더라. '뭐 그렇게까지' 싶었는데 다시 생각하니 맞는 것 같다. 책 내고 인터뷰하는 건 4년여간의 '유폐 생활'을 끝낸다는 의미다."

●이미 기업 고문도 하고 있지 않나.

 "휴맥스, 코리아본뱅크 등에 적을 두고 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굉장히 비체계적으로 생활했다. 하루는 자전거 타고 하루는 등산하고, 골프도 하고. 주로 집에 있으면서 책을 많이 봤다. 친구 중 한 놈은 가끔씩 책을 제 맘대로 골라 여러 권을 보내주는데, 지난 설에도 열 권을 보내주더라."

●주로 어떤 책을 읽었나.

 "요즘에는 종교와 관련된 책에 눈이 많이 간다. 『만들어진 신』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하는가』 같은 책이 특히 눈에 띄었다."

 2007년 신정아씨의 학력 위조 사건은 '그림 로비' 사건으로 확대됐다. 변씨가 신씨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교수 임용과 미술관 기업 후원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혐의였다. 또 기업에 그림 구매를 청탁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2009년 1월 대법원은 변씨에 대해 개인 사찰인 흥덕사에 특별교부세가 배정되도록 압력을 넣은 혐의를 인정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과 사회봉사 160시간을 확정했다. 변씨는 나머지 혐의에 대해선 무죄 판결을 받았다.

●사건을 겪으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나.

 "난 낙관주의자다. 그런데 내가 자살할까 봐 주변에서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날 위로한다며 사람들이 자꾸 나보고 '죽지 말라'고 그러는데, 이 말을 너무 많이 들으니까 나중엔 '정말 죽어야 할 일'인가 싶더라. 불안하고 그랬지만, 분한 마음이 더 많았는데, 그럼에도 죽는 건 웃기는 거였다. '그 사건' 때 일부 언론은 아예 허위 보도를 하지 않았나. 내가 말하는 '언론'이란, 정치적 목적을 갖고 아예 왜곡하는 정치 언론인을 말하는 거다. 실제 당시에 나를 열렬히 공격했던 기자 여러 명이 모두 한나라당 공천을 받았다."

변씨는 책의 서문에서 '김석원의 사면 복권 대가로 3억원을 받았다는 내용' '(변씨의) 주거용 호텔 비용이 뇌물'이라는 보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허위 보도였다"(17쪽)고 썼다.

●분한 마음을 어떻게 다스렸나.

 "마음을 다잡게 해준 것은 책이었다. 많은 사람이 성경책을 많이 보내줬지만, 아내가 보내 준 황대권씨의 『야생초 편지』가 가장 맘에 들었다. '학원 간첩사건'으로 억울하게 십수 년을 감옥에 있던 저자가 잡초를 관찰하며 쓴 글이다. 이런 사람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구나, 했다. 풀려나서도 그 책을 여러 권 사서 감옥에 있는 정상문·박정규 등에게 보냈다."

●그래도 한순간에 인생이 틀어졌는데….

 "엘리트 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한번 그렇게 틀어진 사건에서 길을 잃을지 몰라도 난 아니었다.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입힌 건 굉장히 미안했다. 그런데 나 자신의 추락에 대해선 충격을 감당할 수 있었다. 오히려 그 일을 겪으면서야 내가 진짜 2인자였구나 싶었다. 어찌 됐든 감옥에서 텔레비전 보니까 내가 그해 가장 추락한 인물 1위에 올랐더라."(웃음)

●그만큼 잃은 게 너무 많다는 뜻 아닌가. 그 일이 없었다면 더 성공 가도가 있었을 텐데.

 "정권 끝나면 나는 딱 공직생활을 끝낼 생각이었다. 생활비는 벌어야 하니까 직장에서 고문을 맡고, 정말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 순수 자유인이 되려고, 말 그대로 인간답게 살려고 했다."

●믿기지 않는다.

 "아, 퇴임하면서 그건 하려고 했다. 우리 가족 모두 불러 노 대통령 부부와 기념사진 찍으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나 때문에 못했다."

●큰일을 겪고 나니 인간관계가 달라졌겠다.

 "친구를 변호사로 선임했는데 중간에 수사 압박이 세지니까 손 털었다. 사람들이 모아준 수임료까지 줬는데…. 그런데 다시 다른 친구가 주변 사람을 모아 돈을 모아줬다. 후에도 누가 도움을 줬는지 내게 알려주지도 않았다. 어쨌든 내가 서서히 갚을 빚이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추억

변씨는 2003~2007년 기획예산처 장관과 청와대 정책실장 등을 맡으면서 노 전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 책에 따르면 2007년 사표를 내는 날에도 노 전 대통령은 그를 따로 불러 위로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엔 봉하마을에서 세 번이나 연락을 받았다. 한번 들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개인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너무 미안하고 용기가 안 나 차일피일 미뤘다. 그런데 영영 다시 볼 수 없게 됐다. 서거 뒤 장의위원으로 밀려드는 문상객을 맞으면서 그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책을 쓴 이유가 뭔가.

 "인간적인 빚이 없었다면 안 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받은 것만큼 그의 철학을 정리하는 게 당연했다. 그저 나와 노 전 대통령은 뭔가 바꿔보려 노력하다 그냥 절벽에서 떨어졌다. 그것을 알리고 싶어 낸 책이다. 적어도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라는 오해를 없애야 했다. 또 하나는 지금의 경제정책이 정말 구닥다리라서 화가 났다. 국가 경쟁력이라고 내세우는 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동자 근로시간 1위'라는 게 말이 되나. 600만 명 자영업자는 목숨 건 경쟁을 하고 빈곤층은 생계비에 미달한다. 대기업이 취미 생활하듯 빵집·커피집 다 한다. 양극화가 심해지고, 국민 대다수가 희망이 없는 거다. 나란 사람이 나름 그래도 경제학자고 관료고 우리나라에서 경제정책 이론에 관해서는 누구한테도 지고 싶지 않은 사람 아닌가. 최선을 다해서 글을 썼다."

●명문고·명문대(부산고·고려대 경제학과) 출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그런데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노 전 대통령과 같다. 그런데 미묘한 차이가 있다. 대통령이 사회 정의에 무게를 뒀다면, 나는 사회에서 1%에 속하는 인물이라 그런 것에 약하다. 한데 경제학적으로 봤을 때 99%를 버려두면 더 이상 선진국이 못 되겠다 싶은 거다. 양극화, 고용 없는 성장을 해결하지 않고는 힘들기 때문이다."

 변씨가 노 전 대통령을 특별하게 본 것도 자신과 다르면서도 같은 점 때문이었다. 2001년 민주당 경선 당시 그는 당 수석전문위원이었다. 영향력이 센 자리라 대선 후보들이 너도 나도 밥을 샀다. 이인제·김근태·김중권과의 식사 자리는 비슷했다. 후보들은 연설하고, 참석자들은 알아서 밥 먹고 형식적으로 박수치고 끝났다. 그런데 노무현 후보가 도착하자 휘파람 소리, 박수 소리가 대단했다. 영문을 몰라 동료 직원에게 물었더니 그가 돈 없고 힘없는 사람의 희망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변씨가 경제 전문가로서 '국가 재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오래전부터 생각하던 물음의 답이 됐다. 이후 둘 사이에 특별한 지연·학연이 없었지만 한길을 걷게 됐다고 그는 책에 썼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해 평한다면.

 "한번은 저녁 메뉴에 세발낙지가 나왔다. 난 별로인 음식인데 잘 드신다고 했더니 자기도 별로라고 했다. 그런데 주방에서 맛있다고 신경 써서 내놓은 걸 어떻게 안 먹느냐고 하더라. 그 정도로 사람들을 배려했다. 대통령으로서는 뚜렷한 역사관과 철학의 소유자였다. 모든 결정과 행동을 원칙에 입각해서 했다. 간디는 '국가가 망하는 1번이 철학이 없는 정치'라고 했다. '쇼 하듯' 민생투어하고 군 비상 걸고 그러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다."

●이견은 없었나.

 "몇 번의 인사 문제 빼고는 거의 맞았다. 나중엔 누구 생각이었는지도 헷갈릴 정도였다. 이견이 있어도 내 의견을 스펀지처럼 받아들였다. 지나간 얘기지만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봉하에 내려가신 것에도 내 의견이 반영됐다. 언젠가 주택 문제·종부세 얘기를 할 때였다. '아니 나이 들어 은퇴한 사람이 등산밖에 할 게 없으면서 왜 강남에 살아야 하느냐' 그러시더라. 그래서 내가 그랬다. '그 사람 왜 나무랍니까. 역대 대통령들이 다 서울에 사는데요. 미국은 대통령 마치고 전부 고향에 갑니다. 왜 강남 노인들한테만 그러십니까'라고."

●'사건이 없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없나.

 "사표를 내지 않았으면 원래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는 데 같이 가려고 했다. 그때 크게 두 가지를 준비했다. 하나는 임진강·한강을 함께 개발하는 서해안 공동 개발이었고, 다른 하나는 개마고원에 리조트를 만들려고 했다. 대통령은 진작부터 나하고 같이 가서 김정일한테 내가 설명하길 바랐다. 그런데 그게 무산되니 나중에 주요 사안에도 빠져 있더라. 참 아쉬운 일이다."

●아쉬운 정책들을 안철수씨 같은 대선 후보들에게 조언할 생각은.

"그럴 생각은 전혀 안 해 봤다. 멘토니 뭐니 하면서 말하는 것은 정말 우습다. 얼굴이나 비치려고 하는 것 아닌가."

●앞으로의 계획은.

"블로그(변양균닷컴)를 개설해서 시민들의 생각을 모아가고 싶다. 아이디어를 같이 공유하고 토론하고 그래야지. 지난 정부에 내가 많이 모자랐던 부분이 바로 소통 아닌가 싶다. 정책에 시민사회가 참여할 수 있는 쪽으로 만들어주는 통로가 되려 한다."

●블로그 캐치프레이즈가 '옴니프레젠트 레볼루션(omnipresent revolution)'이다.

"온·오프 상관없이 세상을 바꿔보자는 의미다."

●그런데 공식 활동을 시작하면서 신정아씨 질문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책의 서문에 다 밝혔다. 그게 팩트다.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서문에서 그는 "내 생애 유일한 시련이었으며 가장 큰 고비였다"며 신정아 사건이 "나의 불찰이고 뼈아픈 잘못이었지만, 그 결과가 그리 참혹할 줄 몰랐다는 것이 더 큰 불찰이고 잘못이었다"고 적었다.)

●뭘 잘못했다는 것일까.

"노코멘트 하겠다."

이후 대화는 '기(氣)싸움'에 가까웠다. 변씨는 어떤 질문에도 긴 답변을 내놓을 만큼 친근하고 유연한 태도로 일관했지만, '신정아 사건'에 관한 한 도저히 깨뜨리기 어려운 방어벽을 단단히 쳐놓은 듯했다. 인터뷰 자리를 옮겨 술잔을 나누고 분위기가 풀어졌지만 '신정아'라는 세 음절만 튀어나오면 대화는 이어지지 못했다. 동문서답식 질문과 답이 오갔다.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유에 대해서도 "지극히 개인적 영역"이라며 말을 아꼈다.

●신정아씨가 쓴 책을 봤나.

"그게 왜 중요한 건가. 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책을 읽기 전과 후가 달라질 수 있겠다 싶다.

"다음에 혹시 사적으로 만날 자리가 있으면 그때 얘기하겠다. 더 할 얘기가 있지만 기사로 쓰긴 그렇다."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아까 대답 다 했다."

●그래도 정리를 해야 하지 않나.

"내 입장에서는 정리할 게 없다. 꼭 쿨할 필요도 없고."

●용기가 없는 건가.

"두렵다기보다 그런 것을 함부로 하면 질서가 무너진다. 답을 하다 보면 내가 원래 생각했던 게 뭔가 헷갈리게 되니까."

 대신 그는 아내 얘기를 에둘러 했다. 책에 따르면, 사건이 커지자 오히려 아내는 "내가 (남편에게) 야단칠 일을 국가가 왜 나서서 야단인지 모르겠다" "정도 이상으로 지나친 고생을 하고 있지 않느냐"고 했단다. 변씨는 이런 아내를 두고 "평생 사랑으로 대신할 길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내와의 사이는.

"지난해 봄 아내와 부산에 갔다. 아무래도 안경을 좀 손 봐야 할 것 같아서 안경점에 들어갔더니 주인이 날 알아보더라. 안경을 반값에 해 주겠다며 친절히 대해줬는데, 나중에 내게 사인해 달라고 하더라. 개인적으로 소장할 것이라며 메모지를 들고 왔다. 할 말이 없어서 '행복하세요. 변양균' 이렇게 썼다. 그런데 물끄러미 보던 아내가 나중에 웃으며 그러더라. '그래, 알아보고 사인하니 그리 좋냐'고…."

 그는 그러면서 에피소드 하나를 더 소개했다. 사건이 나고 얼마 안 돼 대형마트에 아내랑 갔는데 사람들이 죄다 자신을 알아봤단다. 감기 때문에 마스크를 썼는데도 말이다. 옆사람에게 소곤대는 모습이 다 느껴질 정도였단다. 꼭 일부러 숨긴 것 같아 더 창피했지만 그래도 아내가 있어서 괜찮았다고 했다.

●극복하기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일에 바빠 가정은 뒷전이었던 젊은 시절보다 지금이 우리 부부에겐 훨씬 소중하고 의미 깊다. 축복 같은 시간이다. 사건이 나고 나서 아내가 먼저 나를 추슬렀고, 나를 먼저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사건 뒤 꽤 오랫동안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힘들었는데 아내가 아니었다면 다시 일어서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다.

"가수 신효범이 '나가수'에 나와서 그러더라.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두고 '안타깝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제는 그런 얘기 안 듣도록 하겠다고. 나도 마찬가지다."

 다음 날 그에게 다시 e-메일을 보냈다. 긴 인터뷰에서도 끝내 속 시원히 듣지 못한 답을 다시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왕 재기(再起)에 나섰다면 한번은 넘어야 할 산이고, 이참에 마음의 짐까지 툴툴 털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겼다. 뜻밖에 하루 뒤 답이 왔다.

●신정아씨에 대한 현재 감정은.

 "내게는 결혼을 해야 하는 아들이 두 명 있다. 그런데 수사과정에서 검찰도 이 질문을 계속 했다. '수사과정과 재판과정을 매일 매일 중계방송해서 아들들의 혼인 길을 막겠다'고 협박하면서 말이다."

●신정아씨 책을 본 소감은.

 "미국의 어떤 노(老)학자가 자신이 오토바이를 애용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는 (얼굴을 덮는) 헬멧을 쓰고 달리기 때문에 아무도 나의 나이를 못 알아본다는 것이고, 둘째는 차량 충돌 사고 시 상대방보다 내가 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음에 와 닿는 설명이었다. 특히 상대방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이 멋있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오토바이가 위험하다며 타는 사람을 말린다. 그런데 그것은 누군지 모르는 상대방보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 위험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이 든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남(젊은 사람)보다 내가 위험한 것이 더 좋은 것 아니겠나. 그래서 나도 올봄부터는 오토바이를 타 보려고 한다. 이미 올해 해야 할 1번 계획으로 세워 놓았다. 또 '모터 싸이클 다이어리' 영화가 멋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건을 겪으면서 가장 후회되는 점은.

 "내가 구속돼 있을 때, 지인들은 물론이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편지가 왔다. 그중에서 잊혀지지 않는 두 분이 있다. 변모·함모씨다. 변씨는 한 번이 아니고 여러 차례에 걸쳐 여러 종류의 많은 책을 보내왔다. 책도 최신 서적을 중심으로 정성스레 고른 것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았다. 함씨는 자기 남편의 예를 들면서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절대로 자살하지 말라'는 아주 아주 긴,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감동스러운 편지였다. 사건의 와중에서 고마운 분들이 너무 많지만, 이 두 분은 잊을 수가 없다.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꼭 찾아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아내에게 힘이 됐던 말, 아내가 힘을 줬던 말은.

 "가족들은 언론에 공포감을 가지고 있다. 어떤 좋은 이야기조차도 언론에 거론되는 것을 절대 싫어한다. 앞의 질문 세 가지는 모두 사실은 가족과 관련되는 질문이다."

●현재의 심경은.

 "이제 모든 것을 다 털고 싶다. 그래서 신정아씨와 관련된 질문들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 질문이다. 이제 4년간의 유폐 생활을 끝내고 새 출발을 하고 싶다. 그래서 내게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 노랫말이 뮤지컬 '빨래'의 주제곡 '빨래'다."

변씨의 답변을 받고 뮤지컬 '빨래'(작사 추민주·작곡 민찬홍)의 주제곡을 찾아봤다. 이런 가사였다. "난 빨래를 하면서 얼룩 같은 어제를 지우고/먼지 같은 오늘을 털어내고/주름진 내일을 다려요/잘 다려진 내일을 걸치고/오늘을 살아요…."

j 칵테일 > > "10대로 돌아간다면 미술 하겠다"

'신정아 사건'에서 변씨와 신씨의 연결고리로 언급됐던 것 중 하나가 미술이었다. 그가 같은 연배의 공무원들과 달리 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고, 실제 대학시절엔 이젤과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그림을 그릴 정도로 미술 사랑이 유별났기 때문. 2005년 기획예산처 장관 땐 첫 기자간담회를 서양미술 400년사가 전시된 예술의전당에서 하기도 했다.

●요즘도 그림을 보러 다니나.

 "갤러리에는 가지 않는다. 이제는 굳이 전시회 안 다녀도 주변에 좋은 그림이 워낙 많으니까."

●예술계 지인도 많겠다.

 "제법 있는데 요즘은 만나지 않는다."

●개인적 컬렉션도 있나.

 "전혀 없다. 난 그림 모으는 것을 좀 우습다고 생각한다. 집에 한두 점 거는 거 말고 혼자 움켜잡아서 뭐 하나. 재력도 없지만."(웃음)

●학창 시절부터 미술에 관심이 있었나.

 "고 2때까지 미대를 가려 했다. 입시 준비도 했고. 그런데 고3이 돼서 부모님께 말씀드리니 반대하시더라. 뭐 그래도 내가 고집했으면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림을 평생 한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취미로 계속 그림을 그리지 않았나.

 "과장·국장 시절에는 그랬다. 그런데 이젤 앞에서 캔버스를 쳐다보며 구상만 해도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가기 일쑤였다. 미술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나중에는 엄두가 안 나더라."

●미술과 경제의 공통점이 있나.

 "명작이 되려면 창조와 혁신이 있어야 한다."

●다시 10대로 돌아간다면.

 "음, 미술을 하겠다. 공무원 해보니까 성직자 같은 굉장히 높은 도덕적 수준이 필요하다. 아웅산 테러로 돌아가신 김재익(1938~83년) 전 경제수석비서관이 그랬다. 하지만 나는 그럴 정도는 못 됐다."

WhatMattersMost?

●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은혜를 갚는 것이다. 남한테 도움을 받은 건 빚이다. 뭣보다 빚을 줄이고 싶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으로 갚아야 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으로 갚아야 한다. 지금부터 갚을 수 있는 만큼 갚아갈 것이다. 다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빚을 갚고 싶다."

3년 걸린 『노무현의 따뜻한 경제학』

성장과 함께 가는 복지 초점

'비전 2030' 재조명

변씨는 책을 쓰는 데 3년을 보냈다. "정책에 대한 열거였다면 자료 정리하는 석 달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참여정부의 철학을 담아야 하다 보니 그리 오래 걸렸다"고 했다.

 책의 골격은 '성장과 함께 가는 복지'에 맞춰져 있다. 1990년대부터 불어닥친 신자유주의는 대기업 위주의 성장일 뿐이라는 지적과 함께 선진국이 되려면 빈곤화·양극화 문제를 국가가 적극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2006년 여야·언론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고 폐기된 '비전2030'을 재조명했다. 당시 '비전 2030'은 2030년까지 국내총생산(GDP) 대비 25% 수준까지 복지 지출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가 "증세를 정당화하는 여론 탐지용" "재정을 파탄 내는 차기 대선용"이라는 악평을 들었다. 책에는 그 외에도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대북정책에 대한 이론과 설명이 실려 있다.

비전2030에 대한 애착이 강하게 느껴진다.

 "장기적 복지 프로젝트는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국민 스스로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앞으로 얼마나 부담해야 하고 어떻게 쓰일지 알려줘야 했다. 미국도 70년 앞을 보고 전망한다."

●왜 실패했을까.

 "손자병법에서 전쟁에서 승리하는 5가지 중 1번이 '같은 뜻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각계와의 소통이 부족했다."

●복지에 대한 필요성은 공감되지만 해결책이 불확실하다. 증세(增稅)를 말하나.

 "해결책은 이 책에서 다 다루기엔 너무나 방대하다. 앞으로 내 블로그에서 더 보여주고 검증을 거칠 것이다. 다만 증세는 반드시 해야 한다. 지금도 복지세·부유세를 도입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름을 어떻게 붙이건 '소득 중심의 직접세'는 나와야 한다. 가령 주식에 붙는 자본이득세 같은 거다. 당시 노 전 대통령도 내 생각에 '말은 맞는데…'라면서 담배만 피우더라."

노무현 전 대통령과 변양균 전 실장(왼쪽).●남미도 복지정책을 펴다 위기를 맞았는데.

 "포퓰리즘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남미는 세금도 안 거두고 재원도 없으면서 많이 쓴 게 화근이었다. 복지국가인 북유럽은 세금을 거둬 복지를 진행하기 때문에 재정위기가 오지 않는다."

●책에서 '복지 지출은 무조건 확대하기보다 쓸 곳에만 쓰자'고 했다. 전면 무상급식에 반대하나.

 "선택적 복지, 보편적 복지는 다 말장난이다. 이것은 여와 야,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분야에 따라 다른 기준을 둬야 한다. 주택·교육·의료·치안은 보편적 복지가 필요하다. 무상급식도 그 연장선에 있다. 선택적 복지를 하려 해도 받는 사람이 절대로 모르게 할 자신이 있어야 한다. 하나 더 얘기하면 반값 등록금도 그렇다. 가격체계를 건드리는 건 경제 운용에서 가장 경계할 부분이다. 등록금은 대학 자율에 맡겨야 한다. 다만 돈이 없어 대학에 못 가는 일은 국가가 나서서라도 없애야 한다. 우리처럼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공부를 하겠다는 건 고마운 일 아닌가."

●참여정부의 대표적 실책이라 꼽히는 부동산 문제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전 한국은행 총재인 박승 교수가 쓴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라는 책이 있다. 그것을 보면 '당시 주택시장의 거품 현상은 세계적이었으며 정책효과에는 시차가 있어서 그 효과가 임기 중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MB정부가 그 후광을 얻고 있다'고 적혀있다."

●한·미 FTA에 대한 찬성 입장은 의외다.

 "출판사에서도, 원고를 읽었던 아들도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며 만류했던 부분이다. 하지만 멀리 보고 크게 가야 한다. 감정적·이념적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작은 나라가 문을 닫아 성장할 수 있나. 미국은 그래도 우리와 보완관계 아닌가. 시장을 개방해도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이를 국가별 기업 간의 경쟁이 아닌 노동자 간의 경쟁으로 보고 피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오히려 내가 보기엔 중국과의 FTA가 더 문제다. 우리와 상충관계이기 때문이다. 당장 노동자·자영업자들이 흔들릴 수 있다."

이도은.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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