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은 아는데 우리는 모르는 섬' 풍도

2010. 1. 25.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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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대부도서 직선 24㎞… 인천서 배편 하루 한 차례청일전쟁 시발점된 해전 벌어져 日서 역사교재에 담아국내서 사료 수집 등으로 '평화 공간' 재조명 움직임

인천 연안부두에서 오전 9시 30분 출발하는 왕경호를 타고 2시간 정도 서해를 가로지르면 한 섬에 닿는다. 선착장 뒤로 나지막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자그마한 섬 풍도다.

경기 안산시 단원구 대부동에 속해 있지만 시민들조차 "풍도가 어디야"라고 묻는 경우가 많다. 반면 일본에서 풍도는 꽤 알려진 섬이다. 최근 지역 시민 단체와 지방자치단체가 한국인은 모르고 일본인은 아는 한국의 섬 풍도를 다시 역사의 중심으로 끌어 내 사람들이 찾는 섬으로 만들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대부도에서 직선거리로 24㎞, 충남 당진군 석문면에서 12㎞ 정도 떨어진 풍도에는 63가구 110여 명의 섬사람들이 산다. 모두들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뭍에서 지척이지만 주민이 적어 인천 연안부두에서 정기여객선이 하루 한 차례밖에 다니지 않는다. 섬 형세는 가파르고 전체가 활엽수로 덮여 있어 농사는 못 짓는다.

조선시대에는 단풍이 아름답다고 풍도(楓島)라고도 불렸지만 1900년대 초 풍도(豊島)로 굳어졌다. 해산물이 풍족하지 않아 가난한 섬. 넉넉해지길 바라는 주민들의 바람이 풍도라는 섬 이름에 녹아 있다. 일본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이 섬이 일본인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된 풍도해전 때문이다.

1894년 7월 25일 오전 7시 52분께 일본군의 쾌속 순양함 세 척이 풍도 서북 해상을 지나던 청나라 함정들을 격파했다. 청이 영국 회사에게 빌려 온 상선 고승호도 이때 약 1,100명의 청나라 군사와 보급품, 장비 등을 실은 채 수장됐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고승호가 보물선으로 알려지며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 잊을 만하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다. 한 풍도 주민은 "요새도 고승호 관련 지도를 들고 섬에 들어와서 물어보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고 말했다.

풍도해전은 청일전쟁의 시작이자 동북아의 패권이 일본으로 기울게 된 계기였다. 이후 일본은 러일전쟁 때도 풍도를 발판 삼아 중국 뤼순(旅順)항에 정박한 러시아 함대를 궤멸시켰다.

일본 역사 교과서는 현재도 청일전쟁의 기선을 잡은 풍도해전을 지도와 함께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일본인들이 풍도에 와 보지 않았지만 풍도를 아는 것은 우리가 이순신 장군 덕분에 가 보지 않았더라도 한산도를 아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한국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풍도가 근대사의 중심에 선 것은 지리적 중요성 때문이다. 풍도는 예부터 서해의 요충지였다.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치기 위해 들어왔던 뱃길에도 풍도가 포함됐다.

고려시대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세곡을 실은 배가 예성강으로 들어가는 연안항로의 길목이었다. 조선 말 외세가 한양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도 풍도 인근을 지나야만 했다. 고종 실록에는 신미양요와 병인양요 직전 풍도 해상에 이양선들이 나타났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다.

또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동해에서는 독도, 서해에서는 풍도를 차지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뱃사람들은 "풍도에서는 경기만을 지나는 모든 배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다"고 한다.

더구나 풍도 해안에는 서해의 다른 섬들과 달리 갯벌과 해수욕장이 없다. 항시 수심이 깊어 큰 배들이 정박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다.

최근 기억에서 잊혀진 섬 풍도를 재조명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역사가와 교사 등이 주축이 된 안산지역사연구모임은 자체적으로 풍도의 역사성을 복원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풍도에 대한 사료들을 모으고, 현장을 찾아 역사의 조각들을 맞추는 일이다. 이 모임은 가칭 동양평화기념관을 설립하자고 시에 제안하기도 했다.

모임 회장이자 안산시사편찬위원인 정진각(57)씨는 "일본에는 승전의 기록이었고, 중국에는 패전의 시작이었으며, 한국에게는 일제시대를 예고한 뼈아픈 사건이 풍도 해상에서 일어났다"며 "승자와 패자를 떠나 동북아의 아픈 과거를 치유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데 풍도만큼 상징적인 공간도 없다"고 말했다.

박광식 대부동장은 "풍도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랜 역사를 머금고 있는 풍도의 가치가 묻혀 있어 안타깝다"고 했다. 박 동장 역시 자체적으로 풍도 관련 자료를 모으고 있다.

지자체들도 풍도의 역사적, 지리적 의미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11일 경기 지역 연안 섬을 운항하는 정기행정선 경기바다콜센터를 타고 풍도를 다녀온 이진찬 도 농정국장은 풍도의 역사를 이야기로 디자인하는 작업을 부서에 지시했다.

풍도를 둘러싼 이야기가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야생화로 유명한 풍도를 자연 그대로 보존하는 측면에만 집중했던 시도 이제는 풍도의 역사성에 주목하고 있다.

시 관계자는 "기존에는 산책로와 자전거순환도로를 조성하는 계획 정도가 있었지만 올해부터 도와 풍도의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키는 사업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창훈기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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