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년 전 20대 이탈리아 청년이 본 조선

2009. 12. 30.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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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현자 기자]

위:오늘날 대한문으로 당시에는 대안문이었다. 편액을 고쳐 단 것은 1906년 5월이다/아래:경복궁 광화문 앞쪽에 있는 해태상(서편)의 모습이다. 뒤쪽으로는 계단 부분이 흙으로 덮여 있는 광화문 월대의 모습이 눈에 띈다.

ⓒ 하늘재

경운궁 일대에서 정동 일대를 담아낸 전경, 서소문 쪽에서 정동교회 부근을 담아낸 모습, 이탈리아 공사관 거리라는 이름으로 통용됐던 서소문 일대의 풍경, 한성전기회사와 종각 일대의 종로거리를 담아낸 전경, 그리고 관립중학교는 물론이고 영어, 법어, 덕어, 이어 등 외국어 해당학교의 수업장면에 대한 탐방사진 등은 그 어느 곳에서도 구경할 수 없는 소중한 사진자료들이다. 그리고 그의 사진기 앞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수많은 이 땅의 사람들과 아울러 당시 대한 제국이 처한 운명과 실상에 대한 담담한 목격담 역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다.

'카를로 로제티'의 책이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알차고 유용한 대한제국 관련 저작물이라는 사실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새롭게 꾸며지는 이 책이 그 시절에 긴박했던 대한제국의 운명을 되새기고 우리네 삶의 모습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충실한 안내서가 되었으면 한다.

- < 꼬레아 에 꼬레아니 > 사진 해설판 '왜 다시 꼬레아 에 꼬레아니인가?' 중에서개인적으로 최근 몇 년간, 100여 년 전 우리나라의 역사 및 문화·풍습 등을 정리, 회고하는 책들을 여럿 만났다. 이런 책들이 많이 출판된 것은 조선말 혹은 일제강점기인 100여 년 전, 우리 민족에게 워낙 중요한 사건들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이런 책들 속 사진들은 눈길을 오래 붙잡곤 했다. 지금과 전혀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 풍경이 신기했고 볼 때마다 마치 숨은그림찾기 하듯 전혀 다른 것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올 때가 많았다. 누군가 표현한 만큼만 읽을 수 있는 글과 다른 사진의 장점이다.

때문에 언제부턴가 당시 사진들을 한꺼번에 정리해서 쉽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종종 하곤 했다. 그러면 100여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과 풍경 등을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공원조성사업이 한창 진행 중인 탑골공원 일대 전경이다. 주변에 담장은 세워졌으나, 지반이 정리되지 못한 상태이고 아직 철거되지 않은 가옥들도 눈에 띈다. 하지만 의당 보여야 할 '팔각정'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흔히 팔각정의 건립시기를 공원개설과 동시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없지 않으나, 이것 또한 올바른 고증이 아닌 듯하다. 관련 자료를 엄밀하게 확인해보면 탑골공원의 개설은 1899년에 착수되는 반면, 팔각정의 건립은 1903년에 가서야 그 흔적이 나타난다.

- < 꼬레아 에 꼬레아니 > 수록사진 설명 중에서

< 꼬레아 에 꼬레아니 > 사진해설판과 1904년에 출판된 < 꼬레아 에 꼬레아니 > 원본

ⓒ 하늘재

< 꼬레아 에 꼬레아니 > (하늘재 펴냄)는 이런 내 바람을 읽어낸 듯한 사진 해설집이다. 카를로 로제티란 이탈리아 청년이 100년 전 한국에 머물렀고 귀국하여 그때 만난 한국과 한국인들을 책으로 출간했는데 그 이국의 청년이 찍은 사진들을 설명한 해설집인 것이다.

'당시 수많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혹은 여행이나 체류)했고, 글과 사진으로 남겼다. 그런데 이 책은 로제티만의 사진을 해설하고 있다. 왜 하필 로제티의 사진인가? 책의 바탕이 되는 로제티의 < 꼬레아 에 꼬레아니 > 는 어떤 책일까? 이미 몇 년 전에 책으로 나왔는데, 사진해설집까지 다시 낼 필요까지 있을까? 대체 어떤 사진들이기에?'

처음에는 내 호기심을 채워줄, 사진만 묶은 책으로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이 사진해설집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궁금해졌다. 아래는 이 책의 공동저자(이돈수·이순우) 중 한사람인 이돈수(한국해 연구소 소장) < 오마이뉴스 > 시민기자와 나눈 이야기들이다.

- 이 책의 바탕이 되고 있는 < 꼬레아 에 꼬레아니 > 와 원저자 '카를로 로제티'는 낯설다.

"카를로 로제티(Carlo Rosseti,1876~1948)는 1902년 11월부터 1903년 5월까지 약 7개월가량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에 머물렀다. 그는 당시 해군 중위의 신분이었으며, 호주와 중국 등지의 순방을 마치고 중국 치푸에서 귀국 대기 중이었다. 그런데 친구이자 당시 서울 주재 이탈리아 초대 영사인 '우고 프란체세티 디 말그라 백작(1877~1902)'이 장티푸스로 사망하는 바람에 그를 대신해 서울에 급파(이탈리아 3대 영사로)된 것이다.

그는 당시 대부분의 이탈리아인처럼 식민지 확장정책을 옹호하고 개척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로 이탈리아의 아프리카 식민지화에 결정적인 지도 등을 많이 만들었다. 이런 로제티가 우리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96년에 서울학연구소에서 < 꼬레아 에 꼬레아니 > 한국어 번역본을 출간했는데 그 책에 수록된 '궁정 복식을 한 여인'이란 제목의 사진 한 장이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지목되면서부터이다. 그가 제국주의적 시각을 가진 인물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의 저작물들이 100년 전 우리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은 그를 평가하는 데 충분하게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위:지금의 광화문 네거리에있는 '칭경기념비전'으로 1902년에 건립되었다. 이후(1906년) 도로확장을 핑계로 만세문은 떼어져 일본인 의사 고조 바이케이의 정원으로 옮겨진다/멀리 보이는 성문은 숭례문(남대문)이며 농부가 밭을 갈고 있는 자리는 지금의 서울역 언저리인 듯하다.

ⓒ 하늘재

- 로제티의 < 꼬레아 에 꼬레아니 > 는 어떤 책이며, 출간 당시 영향이나 반응은?"그가 이때 체험한 한국과 한국인들을 귀국 후 정리하여 출간한 것이 < 꼬레아 에 꼬레아니 > (1904년)다. 당시 러일 전쟁의 발발을 눈앞에 두고 아시아 극동지역과 한국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이 급증했다. 그러나 이를 충족시킬 자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미 한국을 체험한 로제티에게 출판의 요구가 많아졌고 이에 자신이 체험한 한국과 한국인들에 대한 것들을 서둘러 작업하여 낸 것이다. 그는 이 책에 앞서 '한국에서의 서한'을 비롯한 여러 편의 한국 관련 논문을 발표했는데, < 꼬레아 에 꼬레아니 > 는 로제티의 이런 저술들을 종합한 결과물로 최고의 저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로제티의 책은 당시 극동 아시아와 한국 관련 여러 출판물들에 자료로 쓰이면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한국과 한국인을 이해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여러 문헌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 꼬레아 에 꼬레아니 > 는 세계의 어떤 책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한국관련 사진들을 많이 사용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 당시 로제티의 책은 많이 팔렸나?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이 책이 당시 극동아시아와 한국에 대한 것들을 충족시킨 훌륭한 자료였으나 이탈리아어로 쓰였기 때문에 폭발적이라고 할 만큼 많은 수요는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영문으로 쓰였다면 훨씬 많이 팔렸고 우리에게도 좀 더 일찍 알려졌을 것이다. 출간 당시의 원본은 이탈리아에도 거의 없으며 세계적으로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안다.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10년 전에 우연히 갖게 된 책이 유일한 것으로 안다."

- 로제티의 한국 관련 다른 저술은?"책으로는 < 한국에서의 서한 > (1904 1월), < 꼬레아 에 꼬레아니·1권 > (1904년 초) < 꼬레아 에 꼬레아니·2권 > (1905년)이 있다. 이중 < 한국에서의 서한 > 은 1902년 7월에 한 달간 한국에 머무르며 이때 경험한 것을 81페이지 분량의 서한집으로 출판한 것이다. 논문으로는 < 대한제국 > (1902년 12월), < 한국의 인상 > (1904년 2월), < 정치-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본 한국 > (1904년 2월)이 있다.

- 로제티의 사진 성격이나 가치 등에 대해 좀 더 설명해 달라 "1860년대부터 사진기와 사진술이 우리에게 도입되었지만 도입 이후 얼마간 개인의 초상사진이나 주문자의 기호에 맞게 의도하여 제작된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로제티의 사진들은 이런 사진들과 달리 자유로운 주제와 현실감 있는 대상인 한국과 한국인들의 많은 부분들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많다.

그는 날카롭고 재치 있는 관찰자로서 서울거리와 한국과 한국인의 삶을 표현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사진은 한국의 인상을 표현하고 한국인의 삶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도구였던 것 같다. 그가 한국에 체류한 기간이 짧았음에 일부 사진에서는 한국에 대한 편협한 시각이 보이기도 하고 설명의 오류도 보이나 당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것들을 그 어떤 사진들보다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로제티의 < 꼬레아 에 꼬레아니 > 에 실린 사진들은 2003년 5월 만치니와 모르모리오 기획으로 '1900년 초반 한국과 한국인'이라는 제목으로 로마에서 사진전이 개최되기도 했다."

위:밤장수인 어린 아이가 생밤을 좌판에 무리지어 진열하고 있고 앞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다/아래:어린 아이가 길가에 좌판을 벌여놓고 직접 불을 피워 군밤을 팔고 있는 모습니다.

ⓒ 하늘재

- 로제티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시각은?"로제티는 이탈리아의 아프리카 식민지 확장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러나 로제티의 한국행은 이탈리아 식민지 정책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외교관계에 있는 국가에서의 체류이다. 때문인지 그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시각은 따뜻함과 연민이다. 한국인들은 마음도 따뜻하고 순수한데 그걸 보듬어 줄 수 있는 제도가 많이 미흡하다며 정치인들이 일반인들에게 좀 더 많은 것들을 베풀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저술마다 '고요한 아침의 세속적인 나라는 숙명적으로 잠에서 깨어날 수 없는 저녁의 나라가 될 것이다'라며 일본 때문에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혼란스러워져 있음을, 당시 한국이 처한 상황과 입장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가 이탈리아의 아프리카 식민지 학장에 공헌했다는 것, 그의 역량 등을 고려해 볼 때 그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시각은 당시 우리를 이해하는 데 무척 중요할 것 같다."

- 왜 다시 < 꼬레아 에 꼬레아니 > 인가? 사진해설판을 굳이 낸 계기나 이유는?"구한말과 근대 초기와 관련된 역사나 풍습, 문화 등 우리나라 전반의 것들을 종이에 기록한 것들(고지도, 사진, 신문 등)을 오랫동안 수집해오고 있다. 10년 전 우연히 로제티의 < 꼬레아 에 꼬레아니 > 원본을 만나면서 저자와 책에 대한 호기심이 시작됐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이국의 청년이 불과 몇 달 머물렀을 동양의 한 나라에 대해 이렇게 기록을 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지만 < 꼬레아 에 꼬레아니 > 는 세계 그 어떤 책에서도 볼 수 없는 한국 관련 사진들을 많이 담고 있다. 특히 그의 사진은 1903년 5월 이전의 것들이라 가치가 크다. 그간 우리에게 구한말~일제강점기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들 상당수는 1910년 이후 것들이 많고 1905년 이전 것들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100년 전 우리를 아는데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로제티나 < 꼬레아 에 꼬레아니 > 는 거의 잊혀졌다. 한국학연구소가 1996년에 출간했으나 원본이 아닌 번역본을 다시 번역한 거라 텍스트 위주이고 사진도 작아 화질이 많이 떨어진다. 그래서 10년 전에 운 좋게 구한 원본으로 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한국학연구소 번역본 외에 2002년 프랑스어 번역본(노미숙)이 있을 뿐이라 로제티와 100년 전 우리의 모습인 < 꼬레아 에 꼬레아니 > 를 알려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 이 사진 해설집에 실린 사진은 몇 매? 작업을 하면서 신경 쓴 것은?"대략 450매 가량다. 로제티의 원저는 텍스트와 사진이 반반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시대상을 총괄적으로 분석하여 가치 있는 사진들을 오류 없이 분석하고자 신경 썼다. 현재 사진 비평가들 사이에 우리나라 근대 외국인들이 촬영한 사진 그 속에 숨어있는 제국주의적 시각을 연구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이 사진해설집은 이와 상관없이 역사적 사료로서 이루어진 역사 사건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해설하고자 했다."

위:송도의 성문인 개성의 남대문. 왼쪽 문루에 걸린 것은 연복사종이다./아래:개성의 명산품인 인삼을 재배하는 삼포의 전경이다

ⓒ 하늘재

- 어렵고 귀한 책을 낸 것 같다. 사진 설명에 대한 오류를 잡아내는 등 책을 내는 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 같다. 보람도 많았을 것 같다.

"출판한다고 해놓고 책을 내기까지 꼬박 1년 반이 걸렸지만, 10년 전 로제티의 책을 구하면서 그간 로제티의 흔적을 많이 찾았다. 그러니 책으로 나오기까지는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이다. 책을 내고자 작업을 하면서 단지 < 꼬레아 에 꼬레아니 > 의 저자로 알고 있던 이국청년 로제티에 대한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고 당시 이탈리아의 식민지 정책 등 로제티가 살았던 그때의 많은 일들을 알게 되고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았다. 로제티의 한국 관련 다른 저술들을 알게 된 것도 의미 있다. 성과와 보람이 많은 작업이었다."

- 공동저자인 이돈수 이순우 두 분 모두 < 오마이뉴스 > 시민기자로 몇 년 전에 꽤나 중요한 한국 근대 초기 관련한 기사를 쓴 걸로 알고 있다. 이 책을 같이 쓰게 된 이유나 목적이라도 있는가? 썩 의미 있는 작업으로 보인다.

"우리 둘 다 '구한말~한국 근대'에 대한 관심이 많아 계속 연구 중이다. 이순우 선생님은 일제잔재에 관한 오해와 진실이랄지, 우리들이 제대로 알아야 역사와 문화재 관련 글을 계속 써오고 있다. 이와 관련된 책도 여러 권 냈다. 몇 년 전 명성황후 사진 진위여부를 둘러싸고 세간의 관심이 집중될 때 그동안 내가 수집한 결정적인 사진과 자료를 신문과 방송에 제공했는데 이를 계기로 이순우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관심사와 연구 분야가 같은 만큼 노력과 열정을 합하면 훨씬 정확한 자료가 나올 것이라는 뜻을 같이 했다. 우리의 작업이 우선 당장 돈이 되지 않고, 또 힘들게 작업한 만큼 주목을 받지 못하더라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누군가는 꼭 해야 할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앞으로도 이와 비슷한 작업은 계속 할 것이다. 이순우 선생님은 계속 저술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 개인적으로는 한국 근대 관련 책을 준비하고 있으며, 한국 근대 역사 관련 사진전(4월 개관 예정)을 기획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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