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도록 기발한 잉여문화

2011. 12. 15. 12:2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이응일 감독의 디지털 불청객

디시인사이드에서 시작된 인터넷 놀이 창작물들이 높인 한국 사회 집단창의성 지수

나꼼수(팟캐스트 '나는 꼼수다')가 엄청 떴다. 필자는 그들의 정치폭로 못지않게 반가운 것이 '저렴하기 짝이 없는' 4인방의 입담과 태도이다. '봉도사' 정봉주의 도를 넘는 자기자랑, '씨바'로 요약되는 김어준의 건들건들함, '목사아들 돼지' 김용민의 물오른 성대모사, 그리고 '누나전문기자' 주진우의 어눌한 잔소리! 어쩌면 그들은 너무 점잖고 긴장해 피곤한 한국 사회의 정수리에 디오게네스의 감로를 흩뿌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초딩 시절부터 몸에 밴 거지 같은 겸양의 미덕 따위 던져버리고 나도 그들처럼 깔대기도 들이대고 어른들 앞에서 '씨바 졸라' 말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

개죽이, 소피티아, 싱하횽, 헥토파스칼킥…

나꼼수와 성격은 다르지만 우리에겐 그 이전부터 한바탕 웃음 주시고 스트레스 덜어 주시는 인터넷 '짤방'(삭제 방지라는 뜻의 기발한 합성사진) 따위 손수제작물들이 있었다. 대체 이것들은 누가 만들어 올리는 것일까? 그 근원을 추적해 보면 상당수가 '디시인사이드'라는 인터넷 커뮤니티다. 그들은 시간을 들여 일견 쓸모없는 콘텐츠를 만들어내며 스스로를 잉여라 부른다. 그러므로 그들의 잉여 창작물을 모아 '잉여문화'라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초고속 통신망이 아파트 단지마다 파고들고 아이티(IT) 벤처 붐이 일던 시절, 1999년에 디시인사이드(이하 디시)가 탄생한다. 처음에는 디지털카메라와 주변기기를 판매하는 쇼핑몰이 본업이고, 여기에 디카 마니아들이 모여 정보를 공유하곤 했다. 그런데 여기에 직접 찍은 사진을 올리는 갤러리를 개설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좀더 기발하고 재밌는 사진과 댓글을 경쟁적으로 올리더니, 어느 날 그들의 정체성이 선명히 담긴 최초의 발화를 낳았다. '아햏햏'.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표현하기 힘든 멍하고 괴상한 기분을 이르는 말. 곧이어 귀엽고도 이상한 디시의 마스코트 '개죽이' 사진 등장.

이를 시작으로 디시는 온갖 해괴한 유행어와 합성사진의 진원지가 되었다. 초기의 햏자, 득햏, 주침야활, 면식수햏, 방법한다, 쌔우다, ~의 압박, 킹왕짱 등에서 최근의 코렁탕, 우왕ㅋ굳ㅋ, 포풍, 시망, ~긔체, 돋다, 병맛, 병림픽, 멘붕(멘탈 붕괴)에 이르기까지…. 나이 지긋하신 독자라도 이 중 한두 개 쯤은 철업ㅂ은(없는) 자식들 입을 통해 들어보셨을 것이다.

또 그들은 단지 유행어를 넘어서 우리말에 전혀 없던 훌륭한 개념어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손발이 오그라든다'. 이는 누군가가 자신이 놀림거리가 되고 있음을 모를때 그것을 보는 이가 괜히 창피해지는 기분을 일컫는다.

합성사진은 초기에 소피티아, 싱하횽, 헥토파스칼킥, 콩나물밥햏 등에서 출발해, 동영상 편집 기술이 보급되면서 동영상 짤방도 생겨났다. 미국의 게이포르노 배우의 민망한 영상을 모아 극단적인 반복 편집으로 재해석한 '빌리 헤링턴' 동영상은 우리를 아스트랄한 세계로 이끈다. 그 만듦새와 전달하는 심상은 가히 첨단의 비디오아트를 뺨친다. '고자라니' 동영상은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내가 고자라니!"라며 절규하는 심영 배우의 처절한 연기를 훔쳐온 것으로, 괴괴하기 짝이 없는 폭소를 자극한다. '슈퍼스타케이(K) 락통령 힙통령 리믹스'와 공중강하 체험하는 '기자양반' 동영상도 포복절도를 보장한다.

합성사진, 동영상과 같이 고퀄(높은 품질)의 창작물을 만들지 못하는 디시 갤러(갤러리 유저)들은 댓글놀이에 탐닉한다. '늬들 컵라면 먹고 난 다음에 건더기까지 다 먹어라'나 '사람은 똥이야! 똥이라고! 히히! 오줌발사!' 따위의 이상한 댓글을 수백 개씩 도배하는 '꾸준글'은 별다른 기술 없이도 쉽게 잉여 문화에 동참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실명이 아닌 '닉'(닉네임)으로 활동하면서도 열심히 잉여짓을 하는 것은 오직 즐거움 때문이다. 두근거리면서 반응을 확인하고, 또 큰 호응을 얻은 게시물은 '힛갤'(히트 갤러리)이라는 명예의 전당으로 옮겨지는데, 디시인이라면 누구나 힛갤에 가보는 것이 소원이다. 필자의 닉은 누룽치인데, 작년에 디시에 바친 잉여에스에프(SF)영화 <불청객> 덕분에 드디어 힛갤에 입성하는 영광을 누렸다.^.^V

현재 디시에는 '디시의 수도' 4대 갤러리-코갤, 야갤, 와갤, 스갤-를 포함, 하위 갤러리와 지난 갤러리를 합쳐 1300여개의 갤러리가 존재한다. 디시는 포털을 제외한 국내 인터넷 커뮤니티로는 최초로 일일 조회수가 1억회를 돌파한(2007년) 공룡 사이트로 성장한다. 이제 디시는 더이상 마이너에 머물지 않고 '인터넷 하위문화의 저수지'라는 평을 들으며 3대 포털과 방송에서도 인용하는 새로운 원전이 되었다.

또한 디시가 커지고 이용자들이 디시인의 정체성을 내면화하면서 다른 커뮤니티와 영향을 주고받거나 오프라인으로 활동이 확대된 사례도 많다. 황우석 논문조작 규명에 과학 갤이 기여한 일이나, 피겨갤에서 안일하기 짝이 없는 빙상연맹을 대신해 김나영 선수를 그랑프리대회에 출전시킨 일, 북한 사이트 '우리민족끼리' 해킹 사건, 일본 니코동, 2ch과 3·1, 8·15 사이버 대전 등등….

디시인사이드가 비록 인터넷 잉여문화의 선두주자지만 빼놓을 수 없는 곳들이 있다. 디시와 쌍벽을 이루(려 노력하)는 '웃긴대학',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의 패러디 격인 엔하위키와 백괴사전. 또 포털의 특정 게시판이 발전해 자기만의 색깔을 갖기도 한다. 온갖 고민거리, 황당 체험, 귀신과 유에프오(UFO)가 난무하는 네이트 판, 인터넷 토론의 성지 다음 아고라, 자작 웹툰 등 유머의 산실 네이버 붐….

이렇게 미치도록 기발하고 이상한 창작물을 쏟아내는 누리꾼의 잉여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비록 형식의 완성도나 품위 따윈 없지만, 그 속엔 개인이 쉽게 흉내낼 수 없는 번뜩이는 재치, 집요함, 발상의 전환 등이 스며 있다. 필자는 이를 요즘 회자되는 창발성(emergence), 또 '집단 지성'에서 가져온 집단 창의성(collective creativity) 개념으로 설명해본다. 한마디로 '열 명의 신나는 범재가 뭉치면 한 명의 천재보다 낫다'는 얘기다. 누군가 올린 소스를 다른 이가 고쳐 올리고, 또 누군가 아이디어를 덧대며 좋은 안이 채택되고 발전하면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한국의 잉여가 일본 오타쿠와 다른 점

또한 현실세계에서 분절된 개인들의 역량을 가상공간에서 하나로 모아준다는 점에서 '아랍의 봄'을 불러온 에스엔에스(SNS)의 힘이 생각나기도 한다. 현실도피적 오타쿠 중심의 일본 잉여와 달리, 한국의 잉여들이 곧잘 현실의 부조리한 풍경들을 재료로 삼고 성스러운 척하는 것들을 조롱한다는 점은 왠지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이제 5년이라는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올 것이다. 추위에 많은 이들의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봄이 올 때까지, 그리고 그 봄의 푸른 들판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 너무 진지해지지 말자. 흔들리지 않으려면, 명랑하게 씩씩하게 낄낄대며 가자, 자기. <끝>

글 영화감독·사진 디시인사이드 갈무리

<한겨레 인기기사>■ "중국어선 흉기 대항땐 총기사용 책임 안물어"일본대사관 응시하는 한복의 소녀…입·출금 누계 보고 "북 공작금"…국정원의 '황당한 간첩몰이'민주 통합 반대파 '전대 무효' 소송제주 지사 한마디에 감귤아가씨 대회 부활?

공식 SNS [통하니][트위터][미투데이]| 구독신청 [한겨레신문][한겨레21]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