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적나라한 침략기 '의병진압기록'

2009. 8. 11. 10:2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양민사살과 마을 불태운 잔학상 드러나(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이 11일 공개한 일본군의 항일의병 진압기록인 진중일지(陣中日誌.14책)에는 1907년 7월부터 1909년 6월까지 일본군 보병 14연대의 2년간 활동이 분단위로 매일 꼼꼼하게 기록됐다.

일본군은 각 지역의 물자와 교통, 토착민의 정태를 상세히 정리했으며 이를 진압활동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양민을 학살하고 마을과 사찰을 불태우려 하는 등 그들의 잔학상도 이 기록을 통해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기온부터 전투상황까지..분단위로 꼼꼼하게 기록'진중일지'는 14연대가 출국하면서부터 시작해 한반도의 각 지역에 주둔해 의병 진압에 열을 올리는 장면을 눈앞에 보이듯 세밀하게 기록했다.

1907년 7월23일 오후9시 '한국 파견에 관한 준비사항'이란 이름으로 상급부대인 12여단장의 지시사항 총 16항목을 나열하면서 기록은 시작된다.

장교 및 상당관 66명, 하사 79명, 준사관 12명, 하등병 136명, 일이등병 974명, 계산병 3명, 위생부 하사 3명, 마정(馬丁) 5명, 간호수 12명, 소총수리병 1명 등 모두 1천291명이 파견됐다.

이들을 태운 선박은 7월25일 일본 모지항(門司港)을 출발해 이튿날 부산항에 상륙하면서 2년간의 의병진압 활동을 시작한다.

상륙 다음날 연대병력을 여러 개 진압대로 편성해 전국 각지로 파견하면서 '각 수비대는 수비하는 지역에 도착한 뒤 속히 물자, 교통, 위생, 토착민의 정태를 상세히 기록해 상신'토록 명령을 내린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해 진중일지가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각 부대는 서울, 인천, 광주, 목포, 공주, 부산, 울산 등 한반도 중남부 지역으로 파견해 의병을 진압토록 했고 연대본부는 대전에 주둔했다가 이후 문경, 대구 등지로 옮겨다니면서 진압작전을 계속 지휘했다.

매일의 날짜와 요일, 기온을 시작으로 각종 군수물자, 부대이동, 급양(給養.병사의 식사), 무기, 탄약, 위생, 군기위반 등에 대한 사항을 비롯해 전투상황 및 적정(賊情.의병활동 상황)을 명령, 보고, 회보, 전보, 전화, 밀보(密報), 통첩(通牒), 전투보고, 진압보고, 상보(詳報) 등의 이름으로 연대본부에 분 단위로 보고하고 있다.

군령위반 시 심판규정과 내훈에서부터 전투 및 진압결과가 우수한 소대나 중대를 포상하는 내용, 일본군의 전사자 보고도 세밀하게 기록했다. 병사한 군인의 성명과 계급은 물론 대퇴부 관통상 등 어떠한 부상 때문에 사망했는지까지도 나온다.

◇진압기록에 나타난 전투"오후 1시 (문경) 대승사 동쪽 1천m에 있는 1030고지에 이르러 의병 한 무리가 적성으로 침입하는 것을 목격하고 적성 서쪽으로 나와 해당 시장 부근에서 식사를 하던 약 100명의 의병을 공격하니 적은 흩어졌고 이에 따라 동쪽 산기슭 등지에 있는 적에 대한 총검 돌격을 해 해당 지역을 점령함. 적은 골짜기를 경유해 681고지로부터 도곡 방향으로, 일부는 석곡 방향으로 어지러이 후퇴해 우리 병사들이 그들을 석곡으로 추격함. 이 전투에서 적의 사망자 중 발견된 이는 15명이고 부상자는 불명확하고 노획품은 화승총 4정, 깃발 1개, 탄환 약간임. 우리 측의 손해는 소비 탄약 382발. 적의 수괴는 이강년인데, 사망자 중에는 그를 찾지 못했고 적성은 전부 의병이 점령하고 있음"

이와 같이 1907년 9월15일 문경 부근의 전투보고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의병장 이강년(李康秊.1858-1908)의 이름이 보인다.

진압기록은 적의 수와 전투상황, 양측의 사상자, 소비한 탄약과 노획 물품 등을 자세하게 적었다.

'(아무개 대위가 이끄는 중대의) 전투보고' 혹은 '(어느 지역의) 토벌보고'라는 뚜렷한 표제로 보고된 기록만도 200여 건에 이르며, 그 외에도 '전보(電報)', '보고'라는 제목으로 각 중대나 소대의 상황을 보고하는 문서에도 의병과의 전투 및 진압내용이 포함된 경우가 많아 이보다 훨씬 많은 전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민 총살하고 마을 불태워일제는 의병뿐만 아니라 의병에 협조한 양민들도 총살하는 잔혹성을 드러냈다."문경군 신동면 27세 김성달.위 사람은 아군의 상황을 정찰해 폭도에게 편익을 주고 폭도의 수족으로서 거류민에게 손해를 입혔고 체포 신문 중에 도망을 기도해 오전 11시에 사살함"

1907년 9월 17일의 기록이다.1907년 9월 15일 문경 전투에서는 "의병이 사용한 화약 탄환을 저장해 차후 전투 후 해당 촌락을 소각토록"할 예정이란 보고가 있어 마을을 통째로 불태우는 만행까지 서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경의 대승사(大乘寺)라는 사찰도 잿더미로 변할 뻔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14연대장은 1907년 9월 17일 "적도들의 소굴이어서 마땅히 소각해야 하지만 한국의 명사찰이라고 하니 특별히 존속시켜 준다"는 기록을 남겼다.

보급품 관리에 있어서도 '급양품 중 부식물의 2/3는 창고품으로 1/3은 각 부대가 있는 지방에서 조달'한다는 지령이 있어 진압대가 각 지역의 양민들을 수탈한 것이 확인된다.

kimyg@yna.co.kr < 실시간 뉴스가 당신의 손안으로..연합뉴스폰 >< 포토 매거진 ><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Copyright © 연합뉴스. 무단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